요쬬와의 소중한 추억들
지난 12월 7일 토요일, 본가에서 키우던 우리 가족의 사랑스러운 보물, 요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요쬬는 우리 가족과 13년을 함께했다. 기억을 그냥 놓아버릴 수 없어 짧게나마 추억을 써내려가 보려고 한다.
요쬬는 이모가 키우던 요크셔테리어 "땅콩"이 낳은 새끼 중 한 마리였다. 2012년 4월, 이모네 집에서 태어난 요쬬는 그해 7월 부모님의 바람으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요쬬는 단순한 반려견 이상의 존재였다. 어머니는 늘 "요쬬, 니가 우리보다 1년 먼저 가라. 너 가면 우리도 곧 따라갈게."라고 말씀하시며, 요쬬와 여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생각을 품고 계셨다. 그만큼 요쬬는 우리 가족의 구성원으로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 나도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하긴 했지만, 요크셔테리어와는 다른 종을 원했기에 처음부터 큰 관심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쬬가 가장 귀여웠던 어린 시절의 사진이 많지 않은 점이 아직도 아쉽고 미안하다.
요쬬와 가까워진 날들
내가 요쬬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2014년부터였다.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나는 롯데 자이언츠를 열성적으로 응원하며 야구장에 자주 다녔다. 홈과 원정 유니폼을 모두 갖춰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고, 그 열정으로 요쬬에게도 강아지용 유니폼을 사 입혔다. 요쬬와 야구장에 함께 갈 수는 없었지만, 유니폼을 입은 요쬬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그해부터 요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산책을 시키거나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요쬬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하지만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지 않더라도 부모님께서는 요쬬를 거의 모든 곳에 데려가셨다. 요쬬는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산, 바다를 누비며 많은 곳을 여행했다. 요쬬는 부모님과 함께하며 항상 사랑을 듬뿍 받았던 행운의 강아지임에 틀림없다.
어릴 적 요쬬의 다른 요크셔들처럼 까만 털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금빛이나 은빛 털을 가진 형제들 사이에서 까만 털을 가진 요쬬는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요쬬가 어느 순간 시간이 지나며 요쬬의 털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묘한 씁쓸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일상 속의 요쬬
결혼 전 본가에서 부모님과 요쬬와 함께 살던 시절이 생각난다. 피자, 치킨, 중국요리 같은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면 요쬬는 언제나 군침을 흘리며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강아지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애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작은 조각을 내어주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책상에 앉아 영화를 보며 음식을 먹었고, 요쬬는 내 발 밑에서 꼬리를 흔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단순한 일상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부모님이 거주하시는 빌라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럼에도 요쬬는 어릴 때부터 대소변을 항상 집 밖에서 봤다. 아버지께서 매일 새벽 4시, 정오, 오후 4시, 밤 10시, 하루 네 번 계단을 오르 내리시며 요쬬를 산책시키고 대소변을 보게 하셨다. 그 시간들은 아버지와 요쬬 사이의 특별한 규칙이자 일상이었다. 요쬬가 없는 지금,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집 밖에 나갈 일이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으신다. 요쬬와 함께했던 새벽 공기, 정오의 햇살, 그리고 밤의 고요함이 이제는 모두 텅 빈 일상으로 다가오셨을 것 같다.
변화와 나이 듦
내가 결혼을 하고 본가를 떠난 이후, 요쬬와의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다. 요쬬가 7살이 되었을 무렵, 신혼집이 본가와 멀지는 않았지만 매일같이 보던 요쬬를 만나는 일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가끔 본가를 찾으면 요쬬는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에 본 나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꼬리를 흔들다 오줌을 지릴 정도로 기뻐하던 요쬬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뭉클하다.
어느 날 부모님이 요쬬를 우리 집에 맡기셨을 때, 나는 요쬬에게 '앉아'와 '손'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참 오래도록 시도했던 훈련이었지만 정말 안되던 훈련. 포기 직전이었다. 1박 2일 동안의 맹훈련 끝에 요쬬는 결국 이 동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순간 난 정말 기뻤다. 그러나 결국 이건 나한테만 통하는 요쬬의 오빠만을 위한 장기였다.
요쬬가 10살쯤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조금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 무렵 우리 아이가 태어났고, 요쬬를 향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부모님은 여전히 요쬬를 깊이 사랑하셨고, 늘 곁에 두셨다.
점점 약해져 가던 요쬬의 마지막 순간
요쬬가 10살을 넘기며 몸이 쇠약해지는 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빠르고 활달하던 모습은 점차 사라졌고, 치아가 썩어 빠지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요쬬의 혀가 닿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의 행동들이 너무나 미안하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요쬬가 우리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을 때,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쬬의 시력도 점차 약해져 가까운 물체만 겨우 보는 상태가 되었다.
요쬬가 집에 혼자 있을때 식구가 다같이 우루루 들어가도 요쬬는 잠에서 깨지앉았다. 들리지도 않기때문이었다. 직접 손으로 요쬬를 놀라지 않게 살살 흔들어 깨워야했다. 그 좋아하던 간식도 음식도 잘 먹지 못했다. 정말 이제 얼마 안남은건가 싶었다.
그러다 이 달 초,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던 아침에 요쬬가 많이 아프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 본가에 가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요쬬와의 안녕을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 아버지의 카톡이 와있었다.
마지막 인사
그렇게 요쬬는 13년의 시간을 우리 가족과 함께하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생을 마무리했다. 요쬬는 우리 집의 작은 기쁨이자 위로였고, 부모님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였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요쬬는 마지막까지도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며 예의를 갖췄다. 화장실로 이동해 토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도 요쬬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자리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 작은 몸짓은 어쩌면 우리를 향한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요쬬는 떠났지만,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은 우리 가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요쬬가 집 안을 뛰어다니고, 간식을 달라고 애절하게 쳐다보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모습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요쬬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곳에서 평안히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요쬬가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 믿는다.
"요쬬야, 너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어. 우리 가족에게 준 사랑과 웃음, 그리고 따뜻함을 절대 잊지 않을게. 그곳에서도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길 바란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 세상에서의 인연에 진심으로 고마워.
안녕, 우리 요쬬. 너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함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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